水惶傳 一



 옛날 모현에 심씨 성을 가진 부장이 있었다. 심부장은 덩치가 크고 용력이 뛰어났으나, 얼굴이 얽고 말이 어눌해 모두의 놀림을 샀다. 하루는 동료들이 심씨를 희롱하여 말하기를, 심가는 비록 덩치가 크고 용맹이 뛰어나나 얼굴이 얽고 못나 아직 운우의 정조차 알지 못하는 깨끗한 몸이 아니냐 하고 웃었다.

 

 그 말에 심 부장이 한탄하여 말하였다. 여러 동문들은 그리 놀리지 마시게. 나도 한때는 반안같은 외모를 자랑하는 풍류공자였다오. 다만 젊은 혈기와 방자함이 나를 망쳤구나.

 

 그러고서는 심 부장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때는 십 여 년 전이었다. -비록 확인할 수는 없으나- 심가의 말을 빌리자면, 심가는 젊은 나이에도 뛰어난 용맹을 자랑하여 당시에 벌써 백인장의 위치에 있었다. 덩치가 크고 용력도 뛰어난 젊은 무사가 언변은 청산유수요 외모는 반안과도 같으니, 뭇사람들이 모두 함함타 여기어 심가의 성정은 날로 교만해져만 갔다. 그러나 그 교만한 성정마저 재기발랄한 젊은이의 치기 쯤으로 여기어지던 시절이었다.

 

 한날은 심가가 여우가 나온다는 소문이 있는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 고개는 날이 어두워지면 여우가 고갯길에 나타나서 사람을 호린다더라, 정신을 쏙 빼먹는다더라, 고갯길에서 넘어지면 염라대왕 목전까지 굴러간다더라, 그런 이야기까지 나돌고 있는 곳이었다.

 

 염라대왕 운운은 헛소문이라치더라도 -아마 고갯길에서 구르면 위험하기 때문이 아닐런지- 사람 잡아먹는 여우가 나온다니 두려워 할 법도 하건만, 심가는 본디 무장인데다가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어 해가 넘어가고 있음에도 고개를 넘고 있었다.

 

 허나, 고개를 넘는 도중에 해가 완전히 떨어져버리고. 사위는 온통 어둠으로 물들었다. 마침맞게 날은 별도 들지 않는 그믐이라, 심가는 어둠이 두렵지 않은 것은 차지하고서도 제대로 된 등 하나 들지 않았던 터라 결국 고갯길에서 발이 묶이고 말았다.

 

 발 아래조차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어둠, 고개에서 구르기라도 하면 크게 다칠테니 심가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결국 근처 공터에서 야숙을 하기로 결정하고 들짐승을 쫓으려 불을 피웠다. 품에 있던 건량으로 끼니를 때운 심가가 막 잠자리에 들려는 찰나, 그의 눈 앞에 한 소년이 불쑥 나타났다.

 

 막 스물이 되었을까, 소년은 밤늦게 고개에서 길을 잃어 무턱대고 불빛을 따라 왔노라 하였다. 송구스럽기 그지없다는 태도로 소년이 잠시 불을 쬐어갈 수 있겠느냐 묻는데, 모닥불이 비추어 낸 그 외양이 관옥을 깎은 듯 반듯하고 하얀 이마는 양지옥과 같은지라. 연지를 바른 듯 붉은 입술이 곱게 호를 그리며 사근사근하게 웃는 모양새가 퍽 교태롭더라.

 

 심가는 그 소년의 미색에 혹하여 두말할 것도 없이 곁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심가가 일러 말하기를, 달도 뜨지 않은 밤에 길까지 헤매었으니 그 고생이 오죽하랴, 소형제는 어서 불을 쬐어 몸을 덥히고 나와 함께 밤을 나세, 하고 소년을 위무하였다.

 

 그러나 누가 영웅호색이라 하였던가. 이 심가라는 자는 그 외모가 반안과도 같고 용력이 뛰어나니 스스로 영웅을 자처하여 남녀 가리지 않고 색을 즐기곤 하였다. 그러니 소년의 미색을 보곤 자연스레 마음이 동하여 속으로 음흉한 마음을 품고 소년을 위무하는 체 하였던 것이다.

 

 따스한 모닥불이 소년의 긴장과 공포가 덜어준 듯, 곁에 앉은 소년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지는데, 심가는 소년의 눈치를 살피다가 모닥불을 부지깽이로 쑤셔 불을 이는 척 소년의 어깨를 끌어안고 희롱하였다. 그러자 소년 또한 백옥같은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며 심가를 마다않고 마주 희롱하는지라. 소년을 끌어안고 야합하니 그 기쁨이 비할 데가 없더라.

 

 소년이 먼저 잠들고 난 연후에 심가가 불침번을 맡아 모닥불을 지키고 앉아 있다 곰곰이 생각하여 보니, 소년의 복색이 퍽 평범한 사람같지는 않았다. 소년이 맵시 있게 차려입은 담홍색의 비단옷은 문외한이 보기에도 광택이 반드르하게 도는 것이 상급의 것이었고, 길상문과 복사꽃을 닮은 꽃이 금사로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게다가 화려한 비단옷은 흙이나 먼지 한 점 묻은 데 없고, 올이 풀리거나 실밥조차 나간 데가 없어 길을 잃고 헤매인 자의 행색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차려입은 비단옷이나 소년의 깨끗한 손과 외모로 미루어 짐작할 때 여염집 사람은 아니니 귀한 집 도령이 이런 데서 하인이나 호위하나 없이 홀로 다니는 것도 이상할 따름이라.

 

 심가가 문득 생각하기에, 이 소년은 여느 사람과는 다르니 혹여 하늘에서 내려온 천인인가, 지저에서 올라온 요마귀괴인가. 혹 이 소년이 고개에 나타난다는 여우가 아닌가하였다. 소문에 듣자하니, 고개에서 나타나는 여우가 사람을 해치고 정신을 쏙 빼어먹는다고들하니 이를 잡아 죽이면 반드시 그 자신의 명성이며 무용이 드높아질 것이 분명하였다. 그리하여 심가가 소년의 정체를 여우로 의심하여 문득 칼을 빼어들었다.

 

 다만 심가가 생각하기에 소년의 외모가 퍽 아리따웁고 연약하여 감히 자신에게 대적할 바가 못되는지라, 서로이 정을 나누는데 여우인들 또 어떠하냐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심가가 마음을 바꾸어 이이를 사로잡은들 반항이나 할 수 있겠는가. 사로잡은 즉 여우인 첩이 생기는 것 아닌가.

 

 그리하여 심가는 칼을 빼어든 채로도 차마 마음을 굳히지 못하여 그를 칼로 내리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다가, 차후에라도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소년의 비단 옷자락을 칼로 한 뼘 잘라내었다. 그러자, 잠들어 있던 소년이 마치 처음부터 잠들지 않았던 것처럼 벌떡 일어나 고래고래 노성을 지르며 심가를 삿대질하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닌가.

 

 -이놈 심가야, 내 너의 용맹을 어여삐 여기어 눈여겨보고 연을 맺어 네 출셋길을 열어주려 했건만 멍청하고 무례한 것이 오만방자하여 제 앞길을 망치는구나! 네 출셋길은 이제 막히었으니 네가 세운 공은 번번이 다른 이에게 돌아갈 것이며, 네 출세는 부장까지일 것이다!


 하고 일갈하며 심가의 뺨을 거세게 후려치니, 그 힘이 여느 장정 못지않아 심가가 얼굴을 감싸 쥐고 휘청거리며 바닥을 굴렀다. 일다경은 지난 후에야 심가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들었다. 그 때에는 이미 날이 밝아 해가 중천에 떠있었고, 심가와 밤을 보내었던 소년은 이미 온 데 간 데 없었다. 참으로 여우에게 홀린 꼴이 아닌가 생각하며 심가가 한 뼘 잘라낸 비단옷을 움켜쥐었던 손을 풀자, 비단옷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어느새인가 분홍빛의 꽃잎이 되어 있더라.

 

괴이한 일이로다 생각하며 심가는 고개를 털레털레 내려왔다. 뺨은 맞았으나 열감은 없어 심가가 아무 생각없이 길을 가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하 수상하구나. 급기야는 코흘리개 아이가 심가를 손가락질하며 웃는데 그제서야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낀 심가가 맞은 얼굴을 더듬는데, 평소와 같이 매끄럽지 않고 자갈처럼 울퉁불퉁하다.

 

 다급히 면경에 얼굴을 비추어보니 아뿔싸, 반안같은 얼굴은 간데없고 곰보만 남았구나. 당황한 나머지 입을 열어 무어라 외치려는데 말 또한 생각처럼 나오지 않고 어눌하기 짝이 없다. 심씨는 잘난 외모와 말솜씨를 둘 다 잃고 만 것이다.

 

 




 심 부장의 이야기가 끝나자 동료들이 손가락질하기를, 과연 요물을 만났도다 하며 만용을 부려 제 복을 걷어찬 위인이로구나 하고 비웃었다. 밤길에 교태를 부리며 안겨 오는 소년은 과연 괴이쩍다 하지만, 정을 통하고서 칼을 빼드는 것은 무슨 고얀 심보인가. 그 소년이 장담한 대로 과연 심가의 벼슬은 부장에서 멈추었고 그 이상으로 출세하는 일은 없었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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